우리의 선생님들이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대한민국의 역사 교사들이 가르칠 수 없었던 이유는 대한민국사 교과서에 포함되지 않은 탓일 겁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제국기 근대사가 포함되지 않고 단 몇줄 언급에 그친 상황에 의문을 가졌던 시민들이 적지 않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냥 넘어간 분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이상함을 알아채지도 못 하고 지나쳤을 텐데요.
조선 말기와 일제침략기 사이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길래 국사책에서 통채로 사라졌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연구한 정치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모든 역사책을 아무리 뒤져도 우리 근대사를 탐구한 역사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 답답해 하다가 직접 외교문서를 포함한 근대사 자료를 찾아나섰던 황태연 정치학 박사는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연구하는데 10년을 쏟아부은 끝에 우리의 감춰진 역사, 자랑스러운 대한제국기를 소개하는 책 세 권을 펴냈습니다.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2023 가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황태연 박사가 설명한 사실만 들어보아도, 대한국토에서 기생하는 일본극우와 매국노들이 주장해온 '식민지 근대화론'은 고종황제가 이룬 업적을 강탈한 허위 주장이고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왜곡과 허위로 버무린 식민사관을 근거로 오늘도 대한제국과 고종황제를 폄하고 모욕하는 민족반역자들이 대한국토에 넘쳐나는 현실이 부끄럽습니다.
부디 대한국토에 사는 대한(韓)인들이 일본계와 매국노들로부터 당하는 모욕에 분노하고 정신차려서 다시는 매국노들이 권좌에 앉을 수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매국행위를 엄벌로 다스려야 비로소 역사왜곡과 매국행위로 나라를 부정하고 겨레를 모욕하며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민족반역자들과 그들을 “합리적인 보수"로 부르는 가면 쓴 매국노들이 우리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대한제국기는 7천년 우리 역사에서 대한민국이 ‘제국’이었던 유일한 시대였습니다.
대한제국이 설립되기 전 우리나라의 국호이던 '조선'은 독립국가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늘 제후국의 책봉과 인준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황제국을 선언한 1897년 10월 12일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큰 흐름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 대한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일본계가 우리의 역사학계를 장악한 채 작심하고 오랜 세월 역사왜곡을 이어간 탓입니다. 일제침략기에 우리의 유물과 문화재를 강탈함과 동시에 대한국토에서는 백여 년째 대한인들을 세뇌해 말기암처럼 퍼져버린 역사왜곡.
일제는 강압으로 밀어붙인 한일병합을 미화시키려고 대한제국을 폄하고 고종황제를 암군으로 부르면서 모욕하고 짓밟았고 그들의 모욕행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믿어온 어리석은 국사학자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업적에 대한 허위를 근거조차 찾아보지 않은 채 마치 사실이고 진실인 양 여김으로써 제 나라와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침 뱉으며 살아온 셈입니다.
대한제국은 1897. 10. 12 고종황제에 의해 선포됐고 번영하다가 1910. 8. 29 일제와 매국노들에 의해 강제로 일제와 병합된 경술국치로 패망했던, 대한(韓)인들의 7천 년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용감했던 황제가 겨레를 대표했던 제국이었습니다.
🔽 한일병합(韓日倂合) • 한일합병(韓日合倂) •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일제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이 대한제국을 패망시킨 사건
대한제국의 ‘대한’을 만든 고종황제는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덕수궁의 석조전 역시 고종황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물입니다. 석조전은 '구본신참'의 정신에 의해 우리 옛것을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 받아들이는 정신이 깃든 상징적인 건물입니다.
🔽 구본신참 - 19세기 말 개화파에 의해 전개된 서양문명의 수용 논리
1897년 10월 12일 황제로 즉위했고 제국을 선포했으며 13일 반조문이라는 선포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선포문에 ‘이전의 태극기를 제국의 태극기로 한다’ ‘국호는 [대한]으로 한다’고 써 있습니다. 그 반조문에 '[대한]을 국호로 한다’고 써 있으니 대한제국을 국호로 삼지는 않았던 겁니다.
‘[대한]을 국호로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기에는 ‘대한제국’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대한’ 아니면 ‘대한국’ 또는 가장 많이 쓰인 ‘대한민국’이 국호로 쓰였습니다.
'민국’이란 낱말은 영•정조 때부터 쓰던 ‘백성의 나라’ 를 뜻합니다. 영•정조 이전에는 군국이라고 했는데 ‘임금의 나라’라는 뜻이지요. 임금의 나라가 세월이 지나면서 ‘백성의 나라’로 변했던 겁니다.
🔽 민유방본: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평안함
‘서경’에 유명한 우임금의 유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란 뜻의 '민유방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근본이란 말을 줄이면 ‘민방’ 즉 ‘백성의 나라’입니다.
‘민방’을 ‘민국'으로, ‘나라 방(邦)’ 한자를 ‘나라 국(國)’ 한자로 바꿔서 ‘민국’이라는 말이 된 겁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모든 실록이나 기타 여러가지 기록, 가령 ‘국가지사’를 쓸 때 ‘민국지사’로 썼고, ‘국가대계’ ‘국가지대계’를 쓸 때는 ‘민국지대계’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민국’이란 낱말이 가장 많이 쓰인 때가 고종황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한’과 ‘민국’ 두 낱말이 자연스럽게 결합해서 백성 즉 일반 국민을 위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창제됐던 겁니다. 1919년 4월 12일 밤에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정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쓴 사례를 보면 ‘대한민국’이란 말은 신문과 잡지에서 더 많이 쓰였습니다.
‘만세삼창’ 때에도 대한(韓)인들은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제국 만세!'
중화민국의 ‘민국’은 대한민국의 ‘민국'과 뜻이 전혀 다릅니다.
중화민국의 ‘민국’은 공화국을 뜻해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국’은 ‘백성의 나라’를 뜻하고 국민의 국가라는 뜻입니다. 중화민국은 1911년에 등장했지만, 대한민국은 훨씬 이른 1899년에 이미 쓰이기 시작했음이 여러 사료에 기록돼 있습니다.
1899년 뿐만 아니라, 1900년 • 1903년 • 1907년 • 1909년에도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그렇게 일상에서 쓰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셈이고, 1948년 제헌했을 때 이승만도 강하게 주장했던 국호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임시정부 국호와 정식 정부의 국호로 쓰인 ‘대한민국’의 기원은 ‘대한제국’
대한제국에서 쓰인 ‘민국’은 영•정조 때부터 이어온 것이고 ‘대한’은 삼한일통 마한•진한•변한 삼한이 하나로 통일되어 ‘대한’이 된 겁니다. 대한의 '대'는 ‘큰 대’ 한자이지만 뜻은 ‘전부 대' 한자로서 ‘전부•모두’를 뜻합니다. 한 나라 전부 • 우리나라 모두의 뜻으로 고종황제가 ‘대한’이라 지은 거지요.
‘조선’이란 낱말은 중국에서 준 이름이기 때문에 속국 즉 속방국가란 뜻으로 일찍이 없어졌어야 할 국호입니다. 조선이 아닌 한(韓)으로 쓰는 게 옳습니다.
고종은 한(韓)이란 말이 우리 겨레를 가리킨다고 백성에게 통보하거나 설명해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이미 쓰던 말이라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따로 설명하는 절차를 갖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삼한 대부인’이란 말이 있어 가장 훌륭한 부인에게 상을 줄 때 <삼한 대부인> 상을 주었거든요. 이렇듯 삼한이란 낱말을 조선시대에도 계속 쓴 겁니다. 고려시대에도 썼고요.
심지어 일본놈들도 우리 겨레를 ‘한(韓)인들'로 불렀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이미 ‘정한론’을 펼치며 사실상 ‘한(韓)’이란 낱말을 쓴 겁니다. ‘정조론’이 아닌 '정한론'이라고 한 거지요.
🔽 정한(韓)론: 조선 고종 때인 1870년을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 거세게 일었던 조선에 대한 출병을 주장하는 침략론
청나라의 외교문서에서도, 우리나라 병사를 만났고 싸웠던 기록은 전부 ‘한(韓)병’과 조우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대한' 할 때 그 ‘한(韓)’을 넣은 겁니다. 조선의 ‘선병’ 또는 ‘조병’이 아닌 ‘한(韓)병’. 모든 외교문서가 우리를 ‘한(韓)’이라고 불렀어요.
이미 백성들이 일상에서 써왔으니 굳이 백성에게 통보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던 고종의 말은 입증된 사실인 겁니다.
그렇게 ‘대한’이란 말을 썼고, '대한제국'이란 이름은 우리 공식 문서에서 딱 한 번 쓰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을 때 1907년부터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일협약 같은 게 맺어졌지요. 그 기록에 서명이 ‘대한제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언급된 친일 문서가 두세 개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주독립에 기초한 근대화와 개혁을 이루어낸 대한제국기의 국호로 '대한제국'을 쓴 공식문서는 하나만 남았고, 국호 '대한민국'을 일상에서 써온 서민들은 대한제국이란 이름 자체를 쓰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대한제국'이란 이름을 역사에서 쓰는 이유는 두 시대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학자들에 의해 대한제국기와 대한민국기로 나뉘었지만, 대한제국 시절에도 ‘대한’과 ‘민국’이 결합되어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 의해 국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셈이지요.
태극기에 대한 왜곡도 여전합니다.
우리나라 공식 기록은 지금도 여전히 1948년에 태극기를 우리 국기로 삼았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태극기는 우리가 임시정부 시절부터 이미 쓰고 있었으니까요. 임시정부 때 쓰던 태극기는 대한제국기의 태극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고요. 왜곡된 기록을 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3.1운동 당시 우리 대한(韓)인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지, ‘조선독립 만세’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사실상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셈이고, ‘대한민국 만세’ 외칠 때 들고 있던 국기가 태극기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대한제국기 시절 우리의 태극기를 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고종황제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대한민국과 태극기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고종황제께서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녹두장군 전봉준을 포함한 의병들과 소통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폭력에 저항해 싸웠습니다.
1907년에 헤이그 밀사를 파견해서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한 분도 고종황제입니다.
🔽 헤이그 밀사 사건: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고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해서 한국의 주권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활동
1907년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이유로 강제퇴위 당했던 고종황제는 골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계속 밀사와 밀지를 보내서 의병운동을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고종황제께서는 1919년 1월 21일에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돌아가셨습니다.
🔽 고종황제의 장례식 날이 바로 1919년 3월 1일입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독살돼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대한인들이 분노하여 3.1운동이 일어난 것이고 고종황제의 죽음을 매개로 일어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채택한 것입니다. 국호와 국기 모두 고종황제의 유산이었습니다.
자주를 표방하는 북한이 어이 없게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쓰고 있습니다. ‘조선’이란 말은 중국에 종속된 기자조선 때부터 우리가 종속됐음을 뜻합니다. 거짓이지요.
‘조선’과 비교해 훨씬 더 강력한 ‘자주’를 뜻하는 국호가 삼한일통의 ‘대한민국’입니다.
일제가 한일합병했을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총독이 우리 땅에 설치할 총독부 이름을 조선총독부로 정할 거냐 고려총독부로 정할 거냐 대한총독부로 정할 거냐 논란이 있었습니다.
매국노 이완용조차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대한’이라는 말을 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대한’이라는 우리 국호를 쓰지 않은 이유는, 대한제국을 철저히 폄하하고 자주독립 의식의 싹이 트지 못 하도록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선’을 채택해 ‘조선총독부’로 정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국과 태극기의 뿌리가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보다 3년 앞선 1899년 고종황제 시절, 서대문과 동대문을 잇는 전철이 서울에 놓였습니다.
간도가 우리 영토에 편입됐고, 독도가 편입됐으며, 한글 훈민정음이 공식언어로 채택되었고, 수많은 식산흥업 정책과 토지조사사업과 같은 근대적 소유권을 확립하려는 노력과 성과가 있었습니다.
가장 앞서서 근대적 개혁을 하고 봉건적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바로 동학세력입니다. 동학세력은 왕을 받들고 왕의 실질적인 힘으로 개혁하려고 했어요. 반봉건 근대화 개혁을 하려고 했으니 놀라운 사상이지요. 신존왕주의를 가장 열심히 대변한 게 최재우와 전봉준이었습니다.
전봉준의 공초를 보면 서울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왕 곁에 가득한 간신들을 쫓아내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신존왕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왕권을 회복시키려고 한 이유는, 만약 왕권이 없다면 중심을 잡는 권력이 없으니 개혁을 전국적으로 할 수 없을 것임을 내다본 통찰이었습니다.
‘민국’이란 말을 이미 쓰고 있던 동학세력은 고종을 민국의 황제로 받들어 모시려는 왕지존주의를 이미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동학은 세계적인 진운에 맞춰가고 있었어요.
고종은 첨단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애썼습니다.
고종황제가 전봉준에게 내린 밀서에는 '들고 일어나 일본놈을 몰아내고 경복궁에 포로로 잡혀있는 나를 구출해 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밀서가 적에 발각돼 우금치에서 7만 5천명 중 3만여 명이 몰살당한 겁니다. 나머지 수만명은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고 후퇴하다가 흩어져 봉기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 우금치전투 : 1894년 (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동학군은 고종으로부터 밀서를 받은 순간부터 더 이상 난민이나 난류가 아니었고 천병이었습니다. 국군이었던 거지요.
국군인 동학군이 처음 일어난 1차 봉기 때는 민란이었지만 고흥군수를 때려잡으면서 2차 봉기 때는 왕의 밀서를 받고 왕명을 따르기 위해 일어났으니 정식 군대의 임무수행이었습니다.
정식 군대이긴 했으나 무기가 기관총 12정 뿐이었으니 우금치에서는 야간공습도 해보고 게릴라전도 해봤지만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붕괴됐습니다.
국력이 약하여 3만여 국민이 몰살당한 실패에 참담함을 느낀 고종황제.
🔽
신식무기와 신식군대를 가질 수 있는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세운 중요한 국가 이념이자 목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식무기를 만드는 병기창을 많이 세운 때가 대한제국기. 이전에는 우리 스스로 군복을 만들지 못하여 조선군의 군복을 일본에서 만들어 가져와 입었는데, 고종황제 임기 때부터 우리가 군복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고 계급장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고종황제 시절부터 우리는 군복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고 총과 대포도 만들 수 있게 된 겁니다. 대포를 만들다가 화약을 잘못 다루어 폭발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군수산업이 크게 일어났어요. 그리고
고종황제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490여 명의 민족장교가 배출됐습니다.
이전에도 장교는 있었지만, 일본놈이나 러시아가 훈련시키니까 애국심이 별로 없었어요. 민족장교가 아니었던 거지요. 최초로 대한제국무관학교를 통해서 민족장교가 길러지면서 병사들을 우리의 명령에 따르도록 훈련시킬 수 있었고 대한제국 490여 명의 사관학교 졸업생들이 임관하여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 독립군의 기반이 됐습니다.
신흥무관의 교관들은 100%, 이범석씨 한 사람을 제외한 100%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들입니다.
🔽 신흥무관학교 : 1910년대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
🔽 고종황제는 나라를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대한제국무관학교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독립군의 근간을 만들어준 분입니다.
독립군의 절반은 일반 민간인 의병이었지만, 훗날 의병들은 많이 사라졌고 대한제국군 군대의 병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산포수들이 활약했습니다. 가령, 홍범도 장군은 산포수의 대장이었어요.
산포수가 중요한 이유는, 산포수는 옛날 착호군으로 호랑이를 잡는 갑사들이 훗날 화승총으로 교대되면서 산포수로 바뀐 겁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만들면서 이 산포수들에게 자동/반자동 소총과 같은 신식병기를 주었습니다. 그 덕에 산포수들이 엄청나게 강한 국군이 됐고 산포수대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을 정도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총을 제일 잘 쏘았던 사람이 안중근이었습니다. 산포수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안중근은 제2의 고향인 신천으로 이사 간 뒤에는 자신이 포수 대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종이 안중근에게 큰 임무를 맡긴 이유도 안중근의 사격 실력이 뛰어나 장원이 되면서 유명해진 덕분입니다.
안중근은 신존왕주의 의식이 강했고 애국심 뿐만 아니라 총을 가장 잘 쏘는 산포수였기 때문에 고종황제가 밀서를 내린 겁니다.
‘이토를 처단하라’
🔽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
모든 안중근의 공초에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아니다"라고 써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명령을 받은 국군의 임무를 수행한 것임을 말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국사 교과서에는 마치 안중근이 개인적인 분노감을 누르지 못하여 테러한 것처럼 왜곡돼 있습니다. 안중근이 애국지사로 인정되지 못 하도록 일본이 안중근을 일개 테러범으로 몰아온 행태를 두둔할 목적인 것이지요.
안중근이 자신을 대한독립군 의군부 참모중장이라고 밝힌 이유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고 황제의 명에 따라 대한민국을 식민화하려던 원흉 절대악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으니 범죄가 아니라 국군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한 것임을 분명히 한 겁니다. 개인이 아니라 의군부에서 파견한 군인이니 군사재판을 원한 것이고요.
안중근의 공초를 보면 자신을 군사재판으로 넘겨달라고 여러 번 반복해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국사책에서는 여전히 마치 개인 신분으로 이토를 처단한 것처럼 왜곡돼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고 식민사관으로 왜곡한 거짓이니 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고종의 명에 의해서 안중근 의군부 참모중장이 적의 심장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대한제국 국군의 명예를 높였던 겁니다.
고종은 안중근을 파견하면서 26명의 군인들도 함께 파견했습니다. 파견된 26명이 여순부터 하얼빈까지 역마다 두세 명씩 서 있었어요. 셋이 팀을 이루어 작전에 투입된 셈인데, 안중근은 두 명의 동료를 남겨둔 채 혼자서 하얼빈으로 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저격 후 잡힌 안중근이 자신의 직업란에 뭐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산.포.수.
훗날 일본놈들에게 안중근이 자신은 의군부 참모중장이고 의병 대장의 명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은 한 나라 국군의 군인으로서 명을 받고 적을 처단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겁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명을 받은 것이냐고 이름을 대라고 추궁받자, “김두성이 나를 임명했다, 김두성이 우리의 총대장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고종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 그의 명령이었음을 직접 밝히진 않은 겁니다. 칼로 찔러 죽이던지 독약을 먹여 죽이던지 죽여버릴 게 뻔했으니까요.
🔽 안중근 참모중장이 총대장이라고 밝혔던 ‘김두성’이 무슨 뜻인지 우리 국사학자들도 해독하려고 애썼고, 당시 일본놈들도 알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오십여 명의 김두성을 찾아내 살펴보니 절름발이도 있고 어린애도 있어 결국 다 풀어주었는데, 결국 멍청한 일본놈들은 안중근이 아무 이름이나 댔던 거라고 결론내린 꼴입니다.
김두성은 고종황제를 뜻한 이름이었습니다. 황금색을 띄는 북극성은 임금을 상징하는 낱말. 금두성. 김두성.
논어의 '북진이론'을 알지 못하는 일본놈들이 끝내 해독하지 못한 “김두성”을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에 대한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십여 년 연구에 매진했던 황태연 정치학 박사가 찾아낸 겁니다.
대한제국은 당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강한 신식군대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간도와 독도와 울릉도를 확보한 분도 고종황제입니다. 광개토대왕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시대가 고종황제 임기 때였습니다.
독도와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문서 역시 다 고종이 만든 겁니다. 고종을 무시하고 폄하는 놈들이 독도와 간도를 대한민국의 땅이라고 인정하지 못 하는 이유이지요.
고종황제가 우리나라를 근대화 하려고 노력했고 이루어낸 업적은 엄청납니다. 일본놈들이 왜 고종황제를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지랄 염병인지 알 수 있을 만큼 8년의 시간 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고종은 서양문물도 우리의 몸에 맞게 개량하여 받아들이자는 근대화 철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도’ 역시 미풍양속은 지키되 복잡한 제례는 간소하게 줄이도록 하였고, 백성에 이로우면 우리의 것을 지켜서 이어가고 이롭지 않으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구본신참’의 정신으로.
우리의 좋은 전통은 지키고 이어가면서 시대에 맞지 않는 풍속은 서양의 새 기술을 참고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몸에 맞게 개량하여 받아들인 거지요.
서양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에 반대했던 고종.
그는 개혁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서양문물을 들여올 때 치밀하게 연구하고 개량하여 국민에게 전했습니다.
🔽 고종의 개혁은 시작한지 7년 만에 일본을 앞질렀습니다.
일본의 토쿄보다 먼저 전차를 놓았고, 철교도 세웠으며, 시내에 가로등을 설치해 조명한 분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였습니다. 전화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중국•네팔•일본•대한제국 가운데 서울이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큰 도시임을 독일의 지리학자 겐테 박사가 방문 후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겐테 박사는 일본이나 중국은 인력거 끌고 다니는데 대한제국은 전차 타고 쌩쌩 달리더라며 설명한 글을 남겼던 여행가입니다.
그걸 보시면 8년 사이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완전히 서양식으로만 하려고 한 탓에 그들의 전통은 없어졌고 사실상 무너진 문명이 됐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서양 것과 우리 고유의 전통이 정교하게 혼합돼 참으로 아름다운 서울을 만들고 있더라고 증언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본연의 모습이 사라진 토쿄와 새로운 문명의 이기와 대한(韓)인들의 전통이 잘 어우러진 서울을 대비시켜 기록한 겁니다.
🔽 지그프리트 겐테 (Siegfried Genthe, 1870-1904) 독일의 여행가. 지리학자. 기자. 1901년 6월 조선 방문
경제 분야는 어떤 개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을까요?
식산흥업 정책을 폈다고 앞서 언급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근대화된 기업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1910년 1인당 국민소득이 814달러가 됐습니다. 1919년 3.1운동 4년 전인 1915년에는 1048달러가 됐어요. 당시 OECD 통계에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1400달러였습니다.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던 겁니다.
만약 발전 속도를 이어갔더라면 1927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을 앞질렀을 겁니다.
당시 통감부 정치를 1906년부터 시작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놈들이 한 짓이라고는 우리 문물을 갈취해가기 바빴을 뿐, 돈 한 푼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 1915년까지 발전한 모든 업적은 우리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이룬 성과였습니다.
일본놈들이 우리의 고속성장을 보면서 1904년 1905년 일본 공사가 본부에 보낸 보고서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약간의 증감은 있지만 무역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번창하고 있고, 2년 뒤 기록에는 상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고 있다고 써 있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발전을 빨리 막아야 한다는 뉘앙스로 작성된 보고서인 거지요.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고 황태연 박사가 일본 외무성에 보관돼 있는 사료를 본 건데 일본놈들이 그만큼 내밀한 부분까지 대한제국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1904년에 일본이 재무관을 파견하여 조사했어요, 수탈해 가려고 한 거지요.
🔽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일본군의 포위 속에 대한제국의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고 통감(統監)과 이사(理事)라는 일본 관리를 파견
🔽 세도정치: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
🔽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과정: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
고종황제는 1897년 10월 11일부터 1905.11.17 을사늑약 때까지 약 8년 정도만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세도정치 탓에 순조(23대),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은 임기 대부분을 골방에 갇혀 지내는 상태였고, 일본놈들이 동학 핑계로 침략했을 때에도 고종의 권력은 훼절된 상태였어요.
🔽 권력을 사용할 수 없었던 기간의 고종을 탓하면 안 되는 겁니다.
고종황제가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8년(1897-1905) 동안 대한제국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기에 길러진 사람들을 당시 연호가 광무였기 때문에 광무세대로 부르는데, 이 광무세대는 1907년까지만 길러졌습니다.
광무세대가 자라던 당시 우리나라에 3천 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그곳에서 배운 사람들은 전부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이후에 길러진 아이들은 일본놈들이 학교의 수를 7백 개로 줄였고 일제 세대로 부르는데, 그들은 절대 독립운동 하지 않았어요. 일본놈들이 세뇌한 탓이지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고종은 힘이 모자라서 나라를 잃었지만 그걸 되찾을 수 있는 인재는 다 길러주었다” 황태연 박사가 석조전 앞 인터뷰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한 점입니다.
식민사관 퍼뜨리는 어리석은 국사학자들을 나무라면서 황 박사가 한 말:
“맞서 싸우고 또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빼앗긴 것이면, 내 힘이 강해지고 나면 그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일본놈들 류석춘 이영훈처럼 역사왜곡하는 나쁜 놈들은 마치 우리가 우리 주권을 그냥 내준 것처럼 허위로 왜곡합니다."
🔽 사실이 아닙니다.
마치 선물처럼 넘겨준 걸로 만들면 다시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일본놈들이 고종황제를 무능하고 어리석은 왕이었던 양 모욕하고 짓밟으며 거짓으로 세뇌해온 겁니다.
역사의 진실은, 고종황제와 우리의 산포수들, 광무세대에 길러진 독립군 독립운동가 포함한 대한(韓)인들은 싸울 수 있던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웠고 그럼에도 힘이 모자라서 빼았긴 것이지, 절대로 대한제국을 일본놈들에게 순순히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민간인까지 합하여 30만의 대한인들이 죽었고, 갑진왜란 때 국민전쟁에서 또 30만여 대한(韓)인들이 죽었어요. 산하가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였습니다.
한 번도 총을 쏴 보지도 못한 채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는 점.
우리는 끝까지 싸웠고 또 이후에도 싸울 수 있는 인재들을 고종황제가 배출해 주었던 덕분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겁니다.
지청천 장군이 대한제국무관학교 장교 출신이고, 청산리전투 김좌진 장군도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이예요. 다 고종이 길러 낸 장교들입니다.
🔽 지청천 (1888-1957) 광복군 총사령관
🔽 김좌진 (1889-1930)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그 신흥무관학교 교관들도 이범석을 뺀 100% 고종황제가 길러낸 장교들이었습니다.
🔽 이범윤: 1856-1940 독립운동가. 1903년 간도관리사
© Copyright. All rights reserved.
We need your consent to load the translations
We use a third-party service to translate the website content that may collect data about your activity. Please review the details in the privacy policy and accept the service to view the translations.